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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버팀목이던 기업예금 흔들…대출금리도 불안


은행권의 주요 자금 공급원 역할을 해온 기업 정기예금이 감소세로 돌아서면서 금융권에 긴장감이 커지고 있다. 올해 주식시장으로 개인 자금이 이동하는 상황에서도 기업예금은 꾸준히 늘며 은행의 유동성을 뒷받침했지만, 4분기 들어 만기 도래와 기업들의 투자 수요 등으로 자금 이탈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은행들은 고금리 정기예금 상품을 내놓고 은행채 발행도 확대하며 자금 확보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조달 비용이 오르면 저축은행과 카드사 등 제2금융권은 물론 대출을 이용하는 차주들의 부담까지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국내 5대 은행의 기업 정기예금 잔액은 지난 13일 기준 560조5991억원으로 집계됐다. 전월 말 561조2113억원과 비교하면 6122억원 줄어든 규모다. 기업예금은 올해 상반기 주식시장으로 자금이 이동하는 이른바 ‘머니무브’ 상황에서도 은행권의 자금 흐름을 지탱해 왔다.

 

코스피가 8000 중반대까지 올랐던 6월 말 기준 개인 등의 정기예금 잔액은 435조9135억원이었다. 지난해 말 438조8769억원보다 약 2조9634억원 감소한 수치다. 반면 같은 기간 기업 정기예금은 13조769억원 늘었다. 개인 자금이 주식시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기업예금이 증가하면서 은행권은 유동성에 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달 들어 기업 정기예금의 만기가 잇따라 돌아오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일부 은행에서는 전월 말부터 지난 13일까지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기업예금이 8조4000억원 감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기업은 개인과 달리 설비투자나 사업 운영에 큰돈이 필요해지면 만기 예금을 다시 맡기지 않고 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어, 연말로 갈수록 이탈 규모가 커질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기업의 자금 수요는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은행들의 부담이 크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개인 고객은 정기예금 만기가 돌아와도 재예치하는 경우가 많지만, 기업은 설비투자 등 갑작스러운 지출이 발생하면 예금을 다시 맡기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말에는 각종 대금 결제 수요도 늘어나는 만큼 기업예금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산업계에서도 공장 증설처럼 대규모 현금이 필요한 투자 계획이 실행될 때 예금 인출이 집중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업예금 감소 우려는 은행의 유동성 지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 등 4대 은행의 통합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평균은 1분기 말 106.08%에서 2분기 말 106.14%로 소폭 상승했다가 3분기 말 잠정치 기준 104.76%로 하락했다.

 


LCR은 금융회사가 단기적인 자금 유출에 대응할 수 있도록 충분한 고유동성자산을 보유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고유동성자산을 향후 30일간 예상되는 순현금유출액으로 나눠 계산하며, 금융당국의 규제 기준은 100%다. 예상되는 현금 유출 규모가 커지면 LCR은 낮아질 수 있다.

 

기업예금은 LCR 산정에서도 개인예금보다 부담이 큰 자금으로 취급된다. 바젤Ⅲ 기준에 따라 기업의 유형과 예금 성격 등에 따라 개인예금보다 최대 10배 높은 현금유출률이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 정기예금에서 기업예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말 53.2%에서 10월 13일 55.3%로 높아졌다. 기업예금 비중이 커진 상황에서 자금이 빠져나가면 은행의 유동성 관리 부담이 더욱 커질 수 있다.

 

은행들은 자금 이탈에 대비해 수신 경쟁과 채권 발행을 동시에 강화하고 있다. 일부 은행이 연 4% 수준의 고금리 정기예금 특판 상품을 내놓는 것도 기업예금 감소 가능성에 대응해 예금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KB국민은행은 올해 4분기 중 은행채 6조원을 추가 발행하겠다는 계획을 공시했다. 당초 올해 발행 계획으로 잡았던 11조원을 모두 소진한 뒤 추가 조달에 나선 것이다.

 

다른 주요 은행들도 올해 은행채 발행 규모를 전년보다 늘렸다. 금융투자협회 채권정보센터에 따르면 지난 15일 기준 4대 은행의 올해 누적 은행채 발행액은 47조4300억원으로, 지난해 전체 발행액인 45조3000억원을 넘어섰다. 은행권 전체 발행액도 226조3580억원으로 전년도 221조6100억원을 웃돌았다. 일부 은행에서는 4분기 만기 도래 채권이 지난해보다 많고 금리가 더 오르기 전에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는 부담도 나타나고 있다.

 


은행채 발행 경쟁이 심해지면 은행들이 투자자를 확보하기 위해 더 높은 금리를 제시해야 할 가능성이 있다. 연말에는 금융시장 참여자들이 한 해 거래를 정리하는 ‘북클로징’ 시기도 맞물려 채권 수급 상황에 따라 금리 상승 압력이 커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조달 비용 증가는 은행 내부에만 머물지 않을 수 있다. 예금 의존도가 높은 저축은행은 은행들이 예금 금리를 올리면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금리를 인상해야 할 수 있다. 카드사와 캐피탈사 등 여신전문금융회사도 은행채 발행이 늘어 금리가 오르면 자금 조달 부담이 커질 수 있다.

 

대출 이용자에게도 영향이 이어질 수 있다. 은행의 고정형 대출금리는 은행채 금리를 주요 기준으로 삼고, 변동형 대출금리는 예금과 은행채 등 금융기관의 조달 비용을 반영하는 신규 코픽스(COFIX)와 연동된다. 자금 확보 비용이 높아지면 대출금리도 상승 압력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지난 16일 기준 은행권 고정형 대출금리 상단은 연 7.02%, 변동형은 연 6.74%로 집계됐으며, 연내 8%대 금리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제2금융권 역시 높아진 조달 비용을 대출금리에 반영할 수 있어 차주들의 이자 부담이 커질 가능성이 있다.

 

금융당국은 은행권의 자금 조달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최근 정부의 국고채 발행 축소 등으로 은행채와 여전채 금리 간 격차가 줄어들었지만, 기업예금의 변동성이 여전히 남아 있어 시장 상황을 안심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이다. 당국은 이달 초 은행들로부터 은행채 발행 계획을 제출받고 발행 시점을 분산해 달라고 요청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현재 상황이 레고랜드 사태 당시처럼 은행채 발행을 강하게 제한해야 할 수준은 아니라고 설명하면서도, 시장 흐름을 점검하며 은행권에 지속적으로 위험 관리를 당부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업예금 감소가 은행의 유동성 확보 경쟁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연말 자금 흐름과 채권시장 상황이 금융권 조달 비용 및 대출금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